교장선생님의 복음농장 회고

 

1960년 하양 행 좌석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렸다. 마침 다리 근처에 복덕방이 있어서 그곳에 들렸다. 복덕방 주인에게 금호강 쪽으로 탐스럽게 열린 사과밭의 가격을 물었더니 역시 내 계산과 전혀 맞지 않았다. 더 헐값의 땅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이곳에서 약 5리 넘게 떨어진 곳에 산이 하나 있다하여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갔었다. 이곳이야말로 꿈에 그린 복음동산이다.
나는 산을 보니 아주 아담하였고, 잔솔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섰고, 주위 환경도 조용하고, 인가도 드물고, 가격도 알맞고, 그러면서도 약 십분 거리에 교외 버스가 있어 대구와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첫눈에 반했다. 나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 땅을 보여 주시고 매수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 산이 개발되어 아름다운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나무를 심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게 하옵소서.’
나는 속으로 너무 기쁘고 반가웠다. 당장 매매계약을 맺었다.
나는 매우 만족하였다. 수 십 만평의 땅을 산 갑부의 기분이었다.
당시 국민 소득이 불과 100불 미만시대였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식량 증산의 하나로 산에 밤나무심기를 크게 장려하였다. 묘목과 비료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나는 미국으로 출발 직전 아내와 함께 산을 돌아보고 이곳에 밤나무를 심어야 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산꼭대기에 나란히 손잡고 앉아 하나님께 이 산에 심는 나무가 잘 자라서 장차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재산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드렸다.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내 아내가 네 아이와 조카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낮에는 직장(교육대학)에서 교편을 잡아야 하니 아내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크겠느냐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내가 받을 고통을 생각하니 차라리 유학을 포기하고 여기서 신선한 공기를 쉬어가며 산지를 개발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유학의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무거운 짐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떠났다.
내가 떠난 후 1961년 봄이 되자 아내는 경산군청으로부터 밤나무 묘목 1000본을 받아 택시에 싣고 복음동산에 도착했다.
아내는 직장관계로 일하지 못하고 남산동 장인어른 내외분이 오시어 마을 사람을 고용해서 군청직원이 지도하는 대로 묘목 간격을 알맞게 하고 땅을 깊고 넓게 파고 묘목을 심었다.
그 때 밤나무를 심고 나니 봄비가 자주 와서 한 포기도 죽지 않고 파릇파릇 자랐다.
내가 몇 년 후 귀국하였다. 그 때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전국적으로 많은 곳에 밤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중앙 농림부 직원들이 전국 각 군마다 심은 밤나무의 품평검사를 위하여 경산군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경산군에서는 복음동산 외에 여러 산을 검사해 보았으나 신통하게 잘 자라는 밤나무 산이 없었다. 얼마 후 중앙에서 실제 검사를 하러 내려왔다. 경산군에서는 막상 지정 된 산에 안내 하지 않고 복음동산의 밤나무를 소개했다. 그 때 중앙농림부 직원으로부터 “아주 잘 심었다”는 격찬을 들었다고 한다.


1975년 이후 밤나무는 온 산을 덮었다. 밤나무 둥치가 40~50cm가 넘어서 밤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 많은 알밤을 시중에 팔게 되어 한없이 기뻤다.

어린나무 때는 풀을 베고 비료를 치고 북을 돋우어야 나무가 잘 큰다. 나는 많은 돈을 드려 이 나무가 큰 나무가 되기를 온갖 정성으로 돈과 노동 비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노임, 농약, 노동시간과 밤 판매 수지계산이 전혀 맞지 않았다. 그리고 우거진 큰 나무에 독한 농약도 칠 사람조차 구하기 힘들었고 농약을 치지 않은 나무는 벌레가 먹어 전혀 상품가치가 없었다.
이제는 밤을 따는 것조차 힘이 들어서 아주머니들이 주은 알밤을 반반 나눠가지도록 했다.
이와 같이 노임은 천정같이 오르고 밤 값은 노임에 반도 못 따라가니 나로서는 다시금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동안 고민 끝에 1987년도에 온 산의 수종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밤나무를 제거했다. 그 많은 밤나무를 전기톱으로 잘라 내고 그 그루터기에 독한 농약을 발라 다시는 싹이 나지 못하게 했다. 이 일을 시작할 때 나는 내 살을 깎는 듯 한 아픔을 느꼈다. 내가 그렇게 정성을 들였고, 사랑하였고, 아꼈고, 투자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로 아름드리 큰 나무를 베야 되는 이유와 나무들의 아픔을 호소하였다.


큰 밤나무를 베어 낸 후 이웃사람의 충고로 ‘자두’와 ‘복숭아’를 심었다. 다시 내 마음에는 장래를 바라보는 정열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경사진 북쪽 산비탈을 포클레인으로 일주일 이상 작업하여 반듯하게 여러 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큰 꿈과 희망을 안고 노임이니 인건비는 생각도 않고 열심히 식목할 기반을 조성했다. 자두와 복숭아는 불과 3년이면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내 마음이 급하여 기다리지 못하고 3년 이상 되는 자두나무와 복숭아나무 수백그루를 비싼 값을 주고사서 계단에 심었다. 이듬해부터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자두와 복숭아와 무는 반드시 세 번 이상 농약과 소독을 해야 한다. 여기에 따른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내가 직접 소독을 못하니 인부를 구해야 했었다. 탐스럽게 열린 자두와 복숭아를 밭떼기로 팔았다. 몇 해 동안 이런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어떤  해는 모 상인이 밭떼기로 사가더니 매매 후에 큰 손해를 보았다면서 건 낸 돈 얼마를 돌려 달라고 하였다. 옥신각신 하다가 나는 그분의 요구대로 돈 일부를 되돌려 주었다.
나는 자두와 복숭아도 수지계산이 전혀 안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일값이 노임과 농약 값을 전혀 따르지 못 했다. 노임은 매년 30%오르는데 과일값은 5%정도 오르니 큰 손해를 감당해야 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이 동산에 손을 댄지 39년이 지났다. 내게는 지내 온 수천일이 하루같이 기쁨과 희망이 넘친 나날이었다. 하루를 기다리는 것이 수십일 기다리는 것 같이 늘 복음동산을 그리워했다.

내가 첫 번째 심은 밤나무, 두 번째로 심은 복숭아와 자두나무 농사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세 번째 심은 ‘정원수’는 성공적이었다.


나는 나무를 사랑했기에 고향 지보상락마을(약130호)에 은행나무,  백일홍, 감나무, 느티나무, 복숭아, 자두, 앵두, 매실, 산수유, 모과 등을 신․불신 가림 없이 각 가정과 교회에 수 십 년 동안 한 그루씩 지금까지 선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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