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운 김태한 (鳳雲 金泰漢)

복음학원 설립 교장

언어과학회 초대회장ㆍ계명대학교 2대총장

현재) 재단법인 복음장학회 이사장 · 대구남산교회 원로장로

저서) 갚을 수 없는 恩惠ㆍ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ㆍ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外 다수

 

기다림의 미덕

 

새날은 밝아온다

 

일생의 많은 에너지는 회자정리(會者定離)로 소모된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 만날 때는 기쁘고 헤어질 때는 슬프다.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는 기다림이 있다. 인생무상에서 기다림이 응당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지난날의 그리움, 아쉬움, 후회, 사랑, 쓸쓸함도 돌이켜 보니 다 허무하고 무가치 한 것 같다. 그러나 내 삶을 메우는 역할을 한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내 삶의 피가 되고 살이 된 것이다.

우리 일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우리 아이가 일찍 깨어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너무 곤하여 아직도 새근새근 잠자고 있다. 오후가 되니 벌써 돌아와야 하는데 아직도 안 돌아온다. 돌아 올 시간이 지났으니 휴대폰을 걸어본다.

사랑하는 남편이 밥은 이식한데 아직도 소식이 캄캄하다. 따뜻한 저녁 준비는 벌써 다 해 놓았는데 아직 안돌아오니 답답하다.

아내가 차를 몰고 장 보러 가면 벌써 돌아와야 하는데 ‘혹시 교통사고가 났는가’ 의심하면서 창밖을 몇 번 바라보면서 기다린다. 2~30대 젊은 남녀들이 취직자리를 구하는데 온 신경을 쓰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오늘의 사회 현상이다. 아니 일본, 중국, 미국도 취업전쟁에 휩싸여 있다. 모두들 참고 기다린다.

세상은 복잡하다. 그만큼 할 일이 많고 모임도 많다. 해야 할 일이 많고 만날 사람도 많다. 내가 지켜야 할 시간, 의무, 책임도 무거워진다. 남에게 뒤지지 않도록 온갖 힘과 용을 다 쓴다. 이러다보니 기다려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성격이 급한 사람일수록 기다림에 쉽게 지친다.

벌써 70년 가까운 일이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날은 아직 캄캄한데 시골길을 분간할 수 없는 논둑길에 나는 가도오도 못 하였다. 갈려고 하니 집도 절도 없는 험한 산골짜기를 지내야 했다. 얼마 전 이 산골길을 고향사람이 혼자 밤늦게 걷다가 개호지(살쾡이)를 만나 혼이 났다. 개호지는 소리치고 막대를 휘두르니 피하다가 그 사람에게 흙을 몇 번 퍼부어 정신을 혼백하게 만들어 넘어 질 뻔했다. 그 사람은 온 몸이 땀에 젖어 간신히 그 산길을 넘어 죽음을 피하였다.

그 때 나는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에 불안과 지루함과 두려움이 가득 찼었다.

드디어 먼동이 트고 새벽이 왔다. 나는 너무 기쁘고 힘이 나서 단숨에 고향집까지 갈 수 있었다. 나의 일생에 가장 길고 어두웠던 날 중 하나였다. 때는 일제 시대였다. 영천신령농업조합(현 농협)에서 근무 중 고향에서 급한 일로 다녀가라는 소식을 듣고 밤늦게 기차를 탔다. 이튿날 직장으로 돌아올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림은 긴장되고 지루하고 시간이 매우 길게 보이는 답답한 시간이다. 기다린 후에는 새로운 도전이 생기고 밝은 미래를 바랄 수 있다.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은 낙천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새벽을 기다리지 못 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어렵고 때로는 폭풍과 눈보라치는 어두운 밤 같은 인생길에도 반드시 밝은 새벽이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영국의 작가 존 밀턴(1608~74)의 ‘실락원’ 명작은 그가 암울하고 괴로웠던 신혼생활의 어두웠던 때에 쓴 것이다. 그는 매우 다정다감한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부유한 왕당파 가정의 여성과 결혼했다. 그의 아내 메리는 한 달 만에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밀턴의 철저한 청교도 신앙생활에 치쳤던 것이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풍요롭고 자유분방한 가정에서 자랐다. 밀턴의 엄격한 청교도적 삶에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밀턴은 참고 기다렸다. 밀턴에게는 이때가 어둡고 캄캄한 밤이었다. 이 어둠속에 그는 아침을 바라보면서 쉬지 않고 노력했다.

그의 아내는 친정의 몰락으로 밀턴에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철저히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다. 밀턴은 자기 아내와의 이별이 ‘실락원’의 소재가 되었다. 그 고통을 그의 작품으로 승화한 것이다.

우리 인생도 살다보면 많은 것을 잃는 어두운 밤이 온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날이 오듯이 힘써 일하고 새 소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나는 복음동산에 많은 나무를 심었다. 늘 신기하게 느낀 것은 작은 묘목이 꽁꽁 얼어붙은 한 겨울에 북풍의 찬바람에도 용케 견디고 기나긴 겨울을 잘 참는다. 따뜻한 봄이 오면 다시 움이 트고 싹이 나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이 하찮은 작은 묘목도 봄을 기다리니 꽃이 핀다. 길가에 밟혀 사라진 들풀도 봄이 오니 생명의 새싹을 보인다. 나무와 들풀의 생명도 하나님의 섭리로 살아난다.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BC 8세경 희랍의 대 서사시인 호메(Homer)가 쓴 오디세이아 (Odysseia)를 생각해 본다.

오디세이아 장군이 일천석이 군함과 10만 대군으로 대적 트로이 성을 점령했다. 이제 승리의 기쁨을 안고 고국의 처자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항해도중 요정의 바다를 건너야 했었다. 그는 전군에게 귀를 꼭 막고 배만 저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자기를 큰 배 중앙 돛대에 꼭꼭 묶어라하고 귀는 막지 말라고 했다. 출발할때 바닷물은 맑아 거울같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참 가다가 갑자기 안개가 꽉 끼어 앞을 볼 수 없었다. 그 때 자기 사랑하는 부인의 비명과 딸들이 물에 빠져 죽으니 살려 달라고 몸부림치는 처절한 소리를 들었다. 오디세이아장군은 온 몸을 움직여 밧줄을 풀라고 애를 스며 고래고래 큰 소리를 쳤으나 아무도 듣지 못 했다. 배는 가고만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군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자기와 싸웠으나 소용없었다.

안개가 걷히게 되었다. 이 때 장군은 기진맥진 죽은 상태였다. 그러나 고향의 바다가 보였다. 이로서 장군과 전 장병은 고국의 처자를 만날 수 있었다. 고향길이 얼마나 험하고 힘들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인생도 고통의 연속이다. 인생길에 자기를 억제하고 싸우고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의 끝에 행복이 찾아온다.

며칠 전 TV에서 한 목사님 설교에서 자기 교회가 연출한 ‘춘향전’ 드라마를 청취했다. 나는 감격된 한 장면을 보았다. 이도령과 춘향은 남원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열렬한 사랑으로 사귀어왔다. 이러던 중 이도령의 부친이 남원 사도직을 떠나 서울로 영전했다. 이도령도 서울로 함께 올라갔다.

그 후 남원에는 변사도라는 원님이 부임했다. 변사도는 춘향의 수청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춘향은 죽음을 각오하고 수청을 거절했다. 춘향은 감옥에 갇혀 죽음과 수청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한편 서울로 간 이도령은 열심히 공부해서 장원급제했다. 그는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왔다. 그는 부정부패한 변사도를 파직하고 자기가 남원사도 자리에 앉아 춘향의 수청을 요구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춘향은 백절불굴 요지부동의 자세였다.

“내려오는 관장마다 개개이 명관이로구나 수이사또 듣 조이소 충암절벽 높은 바위 바람분들 무너지며 청송 녹죽 푸른 나무눈이 온들 변하리이까 그런 분부 마옵 시고 어서 바삐 죽여주시오 나는 다른 누구에게 어느 누구에게라도 수청 들 수 없소이다.”

 

이때 춘향의 죽음을 각오한 수절의 심정을 읽은 이도령은 환희에 찬 열렬한 사랑으로 춘향을 꼭 껴안았다. 춘향전은 죽음을 각오한 기다림의 아름다운 결실의 드라마이다.

새벽은 반드시 오고 날은 밝아진다. 내 가는 길 멀고 밤은 깊고 내 앞에 험한 준령이 가로막고 있으나 새벽은 밝아온다.

 

하나님이 기다리신다.

 

한 아버지가 밤낮 사립문을 열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집 나간 둘째 아들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다.

하루는 멀리 지평선에 거지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이 아버지가 자세히 보니 분명 몇 년 전에 집나간 아들이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 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 도다…”(눅 15:11-24).

이 아버지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철저히 회개한 아들을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밤낮 아들을 생각하셨고 다시 돌아오니 이와 같이 기뻐하시고 기뻐하셨다. 온갖 죄를 짓고 허랑방탕하고 재물을 탕진한 자식을 용서하시고 최고의 대우를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다.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께서 증거 하셨다.

다음은 하나님께서 기다림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나타내신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관경을 보시고 참다못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대 이변을 발생하게 하셨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 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 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 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 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 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 라…” (마 27:51-5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참을 수 없었던 최대의 고민과 고통의 극치를 나타낸다. 신구약성경 어느 곳에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고민, 고통, 쓰라림을 찾아 볼 수 없다. 우리 인간과 같은 심정을 가지신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심정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의 새 날을 바라보시고 참고 참고 참으셨다. 오, 하나님의 사랑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죽음은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다. 죽은 후에는 하늘나라가 전개된다. 신앙은 새벽을 알려주는 계명성이요. 신앙은 오래 참는 기다림이다.

우리가 굳건한 신앙으로 살아 갈 때 하나님께서 희망과 기쁨의 새 날을 약속하신다. 아니 저 하늘나라를 우리 위하여 예비하고 계신 주님을 뵙게 될 날을 주실 것이다.

 

2010. 2. 23 새벽

희망로 우거에서

List of Articles
NO Subject Date Read
15 순수한 사랑은 없을까? 2013.03.21 8136
14 성공 할려면 2013.03.21 7944
13 사랑의 눈 먼 주님 2013.03.21 7968
12 부조리의 출구(出口) 2013.03.21 7965
11 마음의 공간을 채워야 2013.03.21 8016
10 교회 문턱에서 2013.02.21 6516
9 겉과 속이 다른 ‘나’ 2013.02.21 6787
8 갈림 길에서 2013.02.21 6634
7 가짜에 속지 말자 2013.02.21 6623
6 집착과 십자가 2013.02.21 6577
5 90세 생일 축하연 2013.02.20 6656
4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주먹보다 더 큰 상처 준다 2013.02.20 6674
3 두 가지 사건 2013.02.20 6536
2 사랑의 눈 먼 주님 2013.02.20 6615
» 기다림의 미덕 2013.02.19 7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