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눅 16:19-31)서론: 3주 전에는 눅 16:16-18을 본문으로해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례 요한은 율법이 끝나고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열리는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예수님으로인해 천국의 문이 넓게 열렸습니다. 누구나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율법을 일부러 범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도덕적 율법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나타냅니다. 도덕적 율법은 믿는 자들에게 생활의 지침을 줍니다. 사실, 믿는 자들에게 주신 사랑의 법은 모든 율법을 요약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눅 16:19-31입니다.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화가 아니라 실재로 있었던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실재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호화롭게 살았고 나사로는 거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어서는 그 상황이 반대가 되었습니다. 지옥의 고통 중에 부자는 자신의 상황을 바꾸어 보려 했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있는 형제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지는 복음을 믿지 않으면, 다른 기회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배우기 바랍니다.
1) 이 세상에서의 상황 (19-21): 19. 부자는 이 세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큰 집에서 살았습니다. 권세도 누리고 잔치도 많이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부러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20. 거지 나사로는 가난하고 몸도 약했습니다. 21. 먹을 것이 없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로 배를 채웠습니다. 헌데가 났는데 개들이 와서 그 상처를 핥았습니다. 아무도 거지 나사로를 존경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상황이 좋다고 너무 좋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형편이 나쁘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18). 눈에 보이는 돈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돈은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다시 생깁니다. 직장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집착하면 안됩니다.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의 일시적인 세상이 끝나면 누구나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살 것입니다.
2) 죽고난 다음의 상황 (22-26): 22.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장례식도 치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그를 하늘나라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여기서 천국의 대언자로 나옵니까?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천국에 간 사람의 대표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창 15:6).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장례식도 했습니다. 23. 그런데 그는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라고 다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자는 천국에 갈 확률이 적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마 19:24). 딤전 6:10에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래도 부자되고 싶지요? 지옥에 간 부자는 고통 중에서 눈을 들었습니다. 그는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24.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했습니다. “나사로의 손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시원하게 해 주십시요.”라고 했습니다. 지옥의 고통은 개념이 아닙니다. 실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막 9:48에서,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고통을 아브라함에게 호소했습니다. 25. 그런데 아브라함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세상에서 살때에 예수님은 믿지 않고 호화롭게 살면 그 결과는 지옥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운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것이 실상입니다. 26. 뿐만 아니라 천국과 지옥은 서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3) 우리가 할 일 (27-31): 27.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부자는 마지막 요구를 했습니다. “나사로를 우리 아버지 집에 좀 보내주십시요.” 라고 했습니다. 28. “거기에는 내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가 그들에게 복음을 좀 전하게 해주십시요. 그래서 내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고 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요.”라고 요구했습니다. 29. 아브라함이 또 대답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30. 다급해진 부자가 말합니다, “아닙니다. 죽었다가 산자가 가서 복음을 전하면 더 잘 믿을 것입니다.” 맞는 말인것 같습니다. 31. 그러나 아브라함의 말은 다시 냉정하게 들립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었다가 다시 산자가 전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보통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산자가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는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에 즉시 순종합시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든지, 성경공부를 통해 배우든지, 설교를 듣든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순종합시다. 누가 말씀을 전하든지,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자가 아닌 사람이 전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결국 멸망했습니다. 둘째, 주위의 사람들, 특히 친척과 가족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지옥은 이론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나의 부모나 형제가 지옥에 간다는 것은 참 불행한 사건입니다. 믿지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지옥에 가면 다시 돌아 올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에 복음을 전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