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근 목사

복음고등공민학교 16회 졸업

경북대학교ㆍ대학원 졸업후 도미

현재) 미국 Middle Tennessee State University (MTSU) 심리학과 정교수

     미국 Tennessee Nashville 새생명교회 담임 목회자

 

겸손한 왕 (눅 19:28-40)


서론: 지난 주일에는 눅 19:11-27을 본문으로해서 ‘열 므나 비유’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그 사명을 공통적으로 주셨습니다.

성실한 사람은 그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10므나 혹은 5므나를 남깁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므나를 그냥 수건에 싸 놓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임금님은 나중에 결산할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숨은 생각을 선악간에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자신이 얻은 이익을 그대로 임금님 앞에 가져 옵니다.

선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은 선하고 성실한 종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여러 가지 변명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불성실함을 변명하기 위해 임금님의 약점을 들추어 내려 합니다.

우리 형제 자매님들은 자신을 위해 위대한 큰 종이 되려 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 성실하고 겸손한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에 저희들이 배운 교훈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눅 19:28-40입니다.

삭개오의 집에서 열므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십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 가실 때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 가십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는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


1) 구약의 예언 (28-31): 28.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서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십니다.

전에 말씀드렸지만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18마일 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걸어가면 거의 하루가 걸립니다.

29. 예루살렘에 거의 다 오셔서 감람산이 있는 곳의 벳바게와 베다니 라는 동네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1.5마일 떨어진 곳입니다.

거기서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을 미리 베다니로 보내시면서 부탁하셨습니다.

30. “그 베다니 마을로 가면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 주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주인은 예수님께서 쓰시겠다면 나귀 한 마리 정도는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베다니 마을에 살고 있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남매의 나귀가 아니었겠나 추측됩니다.

예수님께서 전에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 주셨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입니다 (요 11, 12장).

그러니 나귀 한마리 정도는 그냥 가져 오셔도 되는 그런 사이였습니다.

31. 혹시 누가 묻기를, “왜 나귀를 가져 갑니까?’라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주인들은 제자들도 알고 있어서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하면 예수님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나귀 새끼를 가져 오라고 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걸으셔서 피곤하셨기 때문에 나귀를 타시려 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30여세 된 청년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자기만 나귀를 타고 편히 가시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구약 성경 슥 9:9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슥 9:9을 찾아 읽겠습니다.

스가랴는 주전 약 500년 전의 선지자인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 사건은 마 21장과 막 11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유대 임금들이 새로 등극할 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니, 그 절차를 밟아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다스리고 권세를 누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은 우주의 왕이시지만,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에 죽으시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가장 귀한 사업을 위해 예수님께서 구약에 미리 예언된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 합니다.


2) 겸손한 왕, 구원자 (32-38): 32. 두 제자가 그 마을로 들어가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나귀를 만났습니다.

33. 나귀를 풀때에 그 주인들이 왜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34.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가져가라고 했을 것입니다.

35. 나귀를 예수님께 가져왔는데 안장이 없습니다.

세상 임금들은 금으로 장식한 안장을 나귀에게 씌웠을 것입니다.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은 가죽 안장도 없어 제자들이 그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몸으로 오셨고, 자기를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으려 오신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겸손한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겸손히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적습니다.

네비게이토의 2대 회장인 론 쌔니 (Lorne Sanny) 라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섬기는 종으로 겸손히 잘 봉사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론 쌔니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정말 종으로 대할 때,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

36. 예수님께서 그 위에 타고 가시니 사람들이 길 바닥에 자기들의 겉옷을 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37.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 가실 때에 제자들의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동안 행하신 능력의 일을 보고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38.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마 21:9와 막 11:10을 보시면, 무리들이 “호산나!”라고 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구원해 주십시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원자, 즉 메시야로 영접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요 1:1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5:11-12를 보시면,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마음에 계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형제 자매님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께서 계십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계신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입으로 예수님을 “주인님”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고전 12: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롬 10:9-1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입으로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시인하는 것 외에는 구원을 위한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3) 돌들의 소리 (39-40): 39.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니 바리새인들이 비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배웠으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압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요구했습니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즉 구세주라는 사실은 만물이 다 아는데, 이 사람들이 그 사실에 대해 잠잠하면 말못하는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만물이 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데, 성경을 배웠다는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을 부인합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이런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유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신데, 유독 우리 마음에서만은 주인이 되지 못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내 자아가 꽉 차있고 돈이 꽉 차있으면 주님께서는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말로는 자아가 죽었다고 하는데, 자존심 상하는 말 한마디만 들으면, 진짜 죽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생명 없는 돌들이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통해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인이심을 고백하십시다.

내 마음에도 주인으로 모십시다.

주님께서 구세주 되심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도록 합시다.

말씀이 은혜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NO Subject Date Read
66 먼저 할 일 (마 6:25-34) 2013.02.22 5011
65 베드로와 가롯 유다 (눅 22:47-62) 2013.02.22 5154
64 예수님의 기도 (눅 22:35-46) 2013.02.22 5089
63 섬기는 자 (눅 22:24-34) 2013.02.22 4971
62 첫 성찬식 (눅 22:14-23) 2013.02.22 5040
61 유월절을 준비함 (눅 22:1-13) 2013.02.22 5090
60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눅 21:29-38) 2013.02.22 5102
59 예수님의 재림 (눅 21:20-28) 2013.02.22 5011
58 말세의 징조 (눅 21:5-19) 2013.02.22 5144
57 과부의 두 렙돈 (눅 21:1-4) 2013.02.22 4915
56 예수님의 정체성 (눅 20:41-47) 2013.02.22 5463
55 산 자의 하나님 (눅 20:27-40) 2013.02.22 4913
54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눅 20:20-26) 2013.02.22 5103
53 모퉁이의 머릿돌 (눅 20:9-19) 2013.02.22 4983
52 예수님의 권세 (눅 20:1-8) 2013.02.22 4985
51 예루살렘과 그 성전 (눅 19:41-48) 2013.02.22 5013
» 겸손한 왕 (눅 19:28-40) 2013.02.22 5069
49 열 므나 비유 (눅 19:11-27) 2013.02.22 5423
48 삭개오의 변화 (눅 19:1-10) 2013.02.22 5341
47 두 종류의 소경 (눅 18:31-43) 2013.02.21 4973